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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소설가)

(복거일의 보수 이야기) 울타리가 없으면 문도 없다

복거일 | 2014.09.06 09:47 | 조회: 299 | 덧글보기(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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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홈페이지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09/06/15327132.html?cloc=olink|article|default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표류하고 있다. 누가 당을 이끄는지 분명치 않고,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도력도, 추종력(followership)도 사라졌다. 제1 야당의 그런 표류는 어지러운 정국을 부른 가장 큰 요인이다. 집권당과 반대당이 의논하고 타협해야 시민 다수의 뜻이 반영될 수 있다. 새정치연합이 국회를 거부하는 터라 새누리당은 자신을 반대하는 시민들과 소통할 길이 없다.

 

제1 야당을 이처럼 비참한 처지로 몰아넣은 근본적 원인은 정체성의 상실이다. 새정치연합이 무슨 이념을 따라 무슨 정책들을 추구하는 정당인지 당 대표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안철수 의원이 거느린 세력과 합쳐서 정당이 만들어진 뒤, 새로 나온 정책은 ‘새정치’라는 애매모호한 구호뿐이었다. 그동안의 어지러운 이합집산과 당명 개정은 좌파 정당이 정체성을 잃고 표류해 온 과정을 잘 보여준다.

 

뚜렷한 정체성이 없으면 일관된 정책이 나올 수 없고, 일관된 정책이 없으면 합리적 전략이 나올 수 없다. 합리적 전략이 없으니 반대 당과 제대로 협상할 수 없다. 그래서 차분히 협상에 나서는 대신 선동적 소수에 이끌려 농성을 하거나 거리로 뛰쳐나가게 된다.

 

거대한 정당이 어쩌다 정체성을 잃었는가? 정체성은 자신과 환경을 구별하는 데서 나온다. 그런 구별은 울타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신을 둘러싸고 환경을 막아내는 울타리가 있어야 비로소 한 사물의 정체성이 확보된다. 모든 생명체들은 껍질이나 피부로 둘러싸였고, 모든 사회 조직들은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공적 기준을 갖춘다.

 

지금 새정치연합엔 뚜렷한 울타리가 없다. 그래서 시민단체, 노동조합, 이익단체, 심지어 사고 유족과 같은 임시적 집단들이 거리낌없이 정당 안으로 들어오고 점령한다. 당원들과 비당원들이 구별되지 않고, 정당의 안팎이 나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을 내부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려 영향력을 키우려는 당원들도 있다.

 

자연히 정당이 외부 세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것도 가장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세력의 영향에 휘둘린다. 그런 상황에서 차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합리적 정책이 마련될 수 없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데시벨 원칙’이 지배하게 된다. 경험 많은 의원들의 차분한 목소리는 잦아들고, 현실적인 방안들은 극단적 선택에 밀려난다.

 

그래서 여당과의 관계는 늘 적대적이다. 협상은 상대와의 타협인데, 당내 강경파의 주장만을 내세우니 협상이 성공하기 어렵다. 어렵사리 타협이 되면 이번 세월호 사건에 관한 법안처럼 의원총회에서 비준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당의 정체성이나 정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도 아니고, “유족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는 종류의 비합리적 이유로 부결된다. 나라를 구성한 원칙들과 전체 국민의 복리 대신 사고를 만났다는 사정 하나로 변별되는 아주 작은 집단의 뜻을 최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울타리는 중요하다. 울타리는 병균이나 침입자로부터 내부를 보호한다. 그리고 외부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막아내어 내부에 안정적 상황을 마련한다. 이런 안정적 상황에서 비로소 정체성과 생존 전략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실은 생명체에서 먼저 나왔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지방산은 물을 좋아하는 머리와 물을 싫어하는 꼬리가 있다. 그래서 두 겹의 지방산 막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작은 주머니를 이룬다. 머리들은 안팎의 표면이 되고, 꼬리들은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생긴 주머니 안에서 안정적 화학반응들이 나왔고, 원초적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차츰 복잡한 화학반응들이 진화하면서 생명체들의 정체성도 뚜렷해졌다. 작은 주머니를 이룬 지방산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삶은 시작될 수도, 진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당과 외부 환경을 구별하는 울타리가 둘러쳐지고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비로소 새정치연합은 목표와 전략을 다시 지닐 수 있고, 전략의 효과적 실행을 위해 필요한 위계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위계가 자리 잡은 뒤에야 비로소 지도력이 발휘될 수 있다. 위계가 없으니 초선 의원들이 당 대표를 마구 몰아세우고, 당 대표는 힘든 협상 과정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사죄하기 바쁘다. 그런 상황에선 당내의 계파들이 서로 이익을 다투어서 정당의 큰 이익은 당원들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울타리의 또 하나 좋은 효과는 의원들이 거리로 나가는 것을 억제한다는 점이다. 울타리가 없으니 정당과 거리가 그다지 다르지 않고, 조그만 일에도 우르르 몰려나가게 된다.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정책과 전략을 의논해 실행할 수 있다면 거리로 나가려는 충동이 줄어들 것이다.

 

더욱 좋은 효과는 다수 시민들과의 진정한 소통이 잘 되리라는 점이다. 조직이든 사람이든 문을 통해 외부와 교섭하고 소통한다. 울타리가 없는데 어떻게 문을 내겠는가?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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